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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바이로스 때문에 실내 관광지를 피하다 보니 얼마 간은 주로 호수공원을 위주로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서울 인근에 있는 호수공원을 거의 다 가보고 나서 다른 곳을 찾다보니 가게 된 곳이 릉입니다. 몇군데 가 본적도 있구요. 이번에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조선왕조 왕릉 중 9개의 릉이 함께 있는 곳을 다녀왔습니다. 구리 쪽에 있는 릉으로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가 묻혀 있는 곳이지요.

오늘은 구리 동구릉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주요 정보

동구릉의 터는 태조가 죽은 뒤 태종의 명을 받아 한양 가까운 곳에 길지를 물색하던 김인귀가 추천해 하륜이 나가보고 능지로 결정했다고도 하고, 태조가 생전에 무학대사에게 부탁해 자신과 후손이 함께 묻힐 적당한 택지를 정해두었다고도 합니다.

참고로 동구릉은 조선 제1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가 묻힌 현릉, 제14대 선조와 의인왕후와 인목왕후가 묻힌 목릉,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휘릉,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숭릉, 제20대 경종비 단의왕후가 묻힌 혜릉, 제21대 영조와 정순왕후의 원릉, 제24대 헌종과 효현왕후 및 효정왕후의 경릉, 추존된 문조와 신정왕후의 수릉입니다.

개요

- 연락처: 031-563-2909

- 주소: 경기 구리시 인창동 66-1

- 출입 가능 기간:

[2~5, 9~10월] 06:00 - 18:00

[6월~8월] 06:00 - 18:30

[11월~1월] 06:00 - 17:30

- 휴관일: 매주 월요일

- 주차료: 기본 30분 500원, 추가 10분당 200원

- 입장료: 성인(만25세 ~ 만64세)) 1,000원

- 방문한 시기: 2020.03.14

 

 

가시는 길

자차로 가시면 네비 이용하시면 되구요, 대중교통으로는 경의중앙선 구리역에서 2, 6번 마을버스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들어가기

주차장은 입구 바로 옆에 있으니 주차 후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런데 주차장이 그리 크지 않아서 주차가 쉽진 않았습니다.

 

 

이제 매표소 앞에 있는 안내석과 안내도를 확인합니다. 그런데 안내도가 유리로 되어 있어서 빛이 비쳐서 잘 보이질 않네요. 그래서 핸드폰으로 종이 안내도를 찍어봅니다. 참고하세요.

 

 

입구에 매표소가 있으니 매표 후 입장하시면 되구요. 입구에 비치되어 있는 손세정제를 이용하시면 좋겠지요.

 

 

입장을 하면 먼저 오른쪽에 동구릉 역사문화관이 있는데 코로나19의 영향으로 관람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이런 구조물이 있더라구요. 동구릉 외금천교라고 되어 있고 설명이 있는데 상세하게 읽어보진 않았습니다만 대충으로는 외홍전문 앞에 있던 다리 교각 아랫 부분을 공사로 인해 여기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니 보존하는 것은 좋은 일이겠지요.

 

 

이제 홍살문을 지나 걸어가시면 됩니다. 릉은 항상 관리가 잘 되어 있는 곳이라 걷기에는 너무나 좋은 곳이지요.

 

 

조금 걷다보면 오른쪽으로 재실을 앞두고 화장실이 나타납니다. 요즘 화장실은 어딜 가나 깨끗하고 관리가 잘 되어 있더라구요.

 

 

먼저 재실로 가 봅니다. 조선 왕릉의 재실은 제사 준비를 하는 곳으로, 거의 대부분 같은 모양이고 내부도 비슷하지만 안 가볼 수는 없지요. 이렇게 입구로 들어가면 됩니다.

 

 

모습은 역시 전통적인 한옥이지요. 한옥은 볼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인공적인 것임에도 인공적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아요. 재료라든지 색감이라든지 자연과의 어울어짐 등이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인양 그냥 그렇게 한민족의 마음 속에 기억되어 있는 것이 겠지요.

 

 

안과 밖을 두루 둘러보고 담벼락 밖에서도 안쪽을 잠시 훔쳐 보았습니다.

 

 

이제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릉은 문조와 신정왕후의 릉인 수릉입니다. 각 릉에 대한 설명은 안내도에도 상세히 나오지만 홈페이지의 내용을 참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릉은 추존 문조익황제와 신정익황후 조씨의 능이다. 수릉은 한 봉분 안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의 형식이다. 보통의 합장릉은 혼유석을 각각 2좌씩 놓았으나 조선 후기부터 조성된 합장릉은 혼유석을 1좌로 줄여서 조성하였다. 문석인은 기존의 복두관복 대신 금관조복으로 조각하였다.

일반적으로 왕릉은 우상좌하의 형태로 왕이 오른쪽, 왕비가 왼쪽에 모셔지는 것이 원칙이나 수릉은 왕이 왼쪽, 왕비가 오른쪽에 모셔져있다. 이는 세상을 떠날 때의 신분차이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능침 아래에 있는 비각에는 총 2개의 표석이 있는데, 1비는 익종대왕과 신정왕후의 표석이고 2비는 문조익황제와 신정익황후의 표석이다." - [출처]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홈페이지

각 릉의 입구마다 홍살문이 하나씩 있으니 구분은 쉽게 되어 있습니다.

 

 

릉의 구조도 거의 같은 모습이지요. 중앙에 있는 것이 정자각이고, 왼쪽이 수라간, 오른쪽이 수복방입니다. 그리고 정자각 우측에는 비각이 있으며 릉은 그 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지요.

 

 

정자각의 모습을 가까이 보면 이런 모습입니다.

 

 

그리고 비각은 이렇게 생겼지요. 안에는 비석이 있고 거기에 잠든 자의 이력이 적혀있습니다.

 

 

릉의 모습은 가까이 가서 볼수가 없어서 찍기가 힘이 듭니다.

 

 

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문종과 현덕왕후의 현릉입니다.

"현릉은 조선 5대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능이다. 현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의 형태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문종, 오른쪽 언덕(동쪽)이 현덕왕후의 능이다.

현릉의 능제는 『국조오례의』의 제도를 따랐다. 문종의 능 병풍석의 무늬는 이전의 영저와 영탁대신 구름무늬로 바뀌었고, 혼유석 받침대인 고석의 수량도 4개로 줄었다. 능침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를 배치하였고, 중계에는 문석인과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다. 현덕왕후의 능침은 문종의 능침과 같은 상설로 조성하였으나 병풍석을 생략하였다. 현릉 이후부터는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임금의 치적이 국사(실록)에 실리기 때문에 굳이 세울 필요가 없다는 논의 때문이었다." - [출처]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홈페이지

 

 

정자각 뒤로 보이는 릉이 문종의 릉입니다.

 

 

다음은 선조와 의인왕후 및 인목왕후의 릉인 목릉인데 건원릉으로 가는 길에 우측 길로 조금 걸어가셔야 합니다.

 

 

조금 걸으면 이렇게 목릉이 보이게 되지요.

 

 

"목릉은 조선 14대 선조와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와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다. 목릉은 같은 능역 안에 각각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이 선조, 가운데 언덕이 의인왕후, 오른쪽 언덕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선조의 능은 기본적인 왕릉상설에 맞게 조성되어 병풍석과 난간석, 혼유석, 망주석, 석양 및 석호가 배치되어 있다. 의인왕후의 능과 인목왕후의 능은 병풍석만 생략했을 뿐 상설은 선조의 능과 같다. 다만, 의인왕후의 능은 임진왜란을 겪은 후 처음 조성한 능이었기 때문에 석물들의 조각미가 다소 떨어지지만, 망주석과 장명등에 새겨진 꽃무늬는 처음 선보인 양식으로 이후 조선 왕릉 조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정자각은 원래 의인왕후의 능 앞에 있었다. 그러다가 1630년(인조 8)에 선조의 능이 천장되면서 기존의 목릉 정자각을 이건하게 되자 의인왕후 능 앞에 있던 정자각은 헐었다. 이 후 인목왕후의 능이 조성되면서 치우친 정자각을 다시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건이 번거롭다하여 신로만 정자각에 접하도록 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현재 목릉의 정자각은 선조의 능을 향하여 있으면서 신로는 세 능으로 모두 뻗어 있다. 목릉 정자각은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하게 다포식 공포로 지어진 건물로 보물 제1743호로 지정되었다." - [출처]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홈페이지

정자각 뒤로 왼쪽에 보이는 릉이 선조릉이고 오른쪽이 의인왕후의 릉입니다.

 

 

그리고 오른쪽에 별도로 위치한 릉이 인목왕후의 릉입니다.

 

 

다시 길을 내려오면 바로 태조의 건원릉을 만나게 됩니다.

 

 

"건원릉은 조선 1대 태조의 능으로,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고려 공민왕의 현릉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고려 왕릉에는 없던 곡장을 봉분 주위에 두르는 등 세부적으로 석물의 조형과 배치 면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봉분에는 다른 왕릉처럼 잔디가 아닌 억새풀을 덮었는데, 『인조실록』에 태조의 유교에 따라 억새를 덮었다는 기록이 있다.

능침에는 12면의 화강암 병풍석이 둘러싸고 있는데, 병풍석에는 십이지신과 영저 및 영탁 등을 새겼다. 병풍석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고, 난간석 밖으로는 석호와 석양이 네 마리씩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석호와 석양은 밖을 향하고 있는 형상으로 수호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이 있는데,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 모양의 고석 5개가 놓여 있고 양 옆으로는 망주석이 한 개씩 서있다. 중계에는 장명등과 석마 한 필씩이 딸려 있는 문석인이 놓여 있고,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가 양쪽에 놓여 있으며 가운데에는 정중석이 있다.

능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수복방, 수라간, 홍살문, 판위 등이 배치되어 있고, 비각 안에는 태조가 세상을 떠나고 태종대에 세운 신도비와 대한제국 선포 후 태조고황제로 추존된 능표석이 세워져 있다." - [출처]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홈페이지

릉의 모습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갈대로 덥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릉은 관리를 안하는 건지 아니면 관리자의 미움을 받는 건지... 등의 말도 안되는 얘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역시 이유가 있었네요.

 

 

정자각의 모습은 비슷합니다. 다만 여기에 있는 정자각은 조선왕릉 조성제도에서 표준이 되는 건물이라고 합니다.

 

 

릉으로 가는 길은 항상 소나무가 많은 길이지요. 사계절 푸르른 나무라 좋은 것이지요.

 

 

다음으로 만나는 릉은 장렬왕후의 릉인 휘릉입니다.

"휘릉은 조선 16대 인조의 두 번째 왕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이다. 단릉 형식으로 봉분에는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난간석에는 십이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다.

능침 주변의 석양과 석호는 아담한 크기에 다리가 짧아 배가 바닥에 거의 닿을 정도이다.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은 5개로 배치하였다. 조선 전기 왕릉의 고석은 모두 5개였다가 세종의 영릉 이후에는 4개로 줄었는데, 휘릉에 와서 다시 초기의 형식을 따르게 되었다. 이는 건원릉의 예를 잠깐 따른 것으로, 휘릉 이후의 왕릉에는 다시 고석을 4개씩 배치하였다.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홍살문 등이 배치되었다. 휘릉 정자각은 다른 왕릉의 정자각과 달리 정전의 양 옆에 익랑을 추가하여 웅장함을 더하였다." - [출처]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홈페이지​

 

 

이어서 만나는 릉은 영조와 정순왕후의 원릉입니다.

"원릉은 조선 21대 영조와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김씨의 능이다. 쌍릉의 형태이며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영조, 오른쪽(동쪽)이 정순왕후의 능이다.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왕과 왕비의 능 앞에 각각 혼유석 1좌씩 배치되었다. 망주석 기단부에 조각된 꽃무늬가 세련되고 화려하며 오른쪽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는 위를 향하고 있고, 왼쪽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는 아래로 내려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 장명등은 사각옥개형의 장명등으로 화사석과 옥개석 부분을 제외하고 상, 중, 하대석 부분은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영조의 원릉을 시작으로 중계와 하계 사이의 단을 없애고 문석인과 무석인을 한 단에 같이 배치하였다.

능침 아래의 비각에는 총 3기의 표석이 건립되었다. 1비는 1776년 영조 승하 후에 세운 영종대왕 표석, 2비는 영조 추존 후 세운 영조대왕 표석, 3비는 1805년(순조 5)에 세운 정순왕후 표석이다." - [출처]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홈페이지

 

 

릉들이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헌종,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의 릉인 경릉입니다. 여기는 릉이 세개가 함께 있습니다.

"경릉은 조선 24대 헌종성황제와 첫 번째 왕비 효현성황후 김씨와 두 번째 왕비 효정성황후 홍씨의 능이다. 경릉은 세 개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삼연릉의 형태로 조선왕릉 중 유일하다. 정자각 앞쪽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헌종, 가운데가 효현성황후, 오른쪽이 효정성황후의 능이다. 세 봉분은 모두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난간석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각 봉분 앞에는 혼유석을 따로 설치하였다.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홍살문, 판위 등이 배치되었으며, 비각에는 한 개의 표석이 있다. 표석은 대한제국 선포 후 황제 추존으로 바꾼 표석으로, 전면에는 ‘대한 헌종성황제 경릉 효현성황후 부좌 효정성황후 부좌’라 써있다." - [출처]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홈페이지

 

 

정자각이구요.

 

 

3개의 릉입니다(릉은 능이라고 쓰고 기라고 센다는 데 저는 그냥 편하게 부르겠습니다).

 

 

가는 길에 옛날에 즐겼던 놀이들도 체험이 가능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즐겨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다음은 단의왕후의 혜릉입니다.

"혜릉은 조선 20대 경종의 첫 번째 왕비 단의왕후 심씨의 능이다. 단의왕후는 처음 왕세자빈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이전의 순회세자묘(순창원)와 소현세자묘(소경원)의 예를 참조하여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경종이 왕위에 오른 후 단의왕후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혜릉이라 하였고, 1722년(경종 2)에 능의 형식에 맞게 무석인, 난간석, 망주석 등 석물을 추가로 제작하였다. 능침의 석물은 명릉 이후의 양식을 그대로 따라 작게 조각하였다.

장명등은 현재 망실되어 터만 남아있고, 정자각은 광복 후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95년에 새로 복원하였다." - [출처]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홈페이지

 

 

정자각의 모습이구요.

 

 

단의왕후의 릉입니다.

 

 

마지막으로 가는 곳은 현종과 명성왕후의 릉인 숭릉입니다.

"숭릉은 조선 18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능이다. 숭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형식이다.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난간석으로 두 봉분을 연결하였으며 능침 앞에는 혼유석이 각각 1좌씩 놓여 있다.

그 밖의 석양, 석호, 망주석, 문무석인, 석마 등은 일반적인 조선왕릉의 형태로 배치되었다. 숭릉의 석물은 효종의 구 영릉의 석물을 다시 사용한 것으로, 영릉이 여주로 천장될 때 석물을 묻었다가 다시 꺼내 사용하였다.

망주석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위쪽에는 ‘세호’라고 불리는 작은 동물 조각이 뚜렷하게 조각되어 있다. 능침 아래에 있는 정자각은 조선왕릉 40기 중 유일하게 남은 팔작지붕 정자각이며, 보물 제1742호로 지정되었다." - [출처]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홈페이지

그런데 여기는 정자각 등을 수리 중으로 볼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뒤쪽으로 릉은 멀리서 볼수 있었습니다.

 

 

이제 되돌아 나갑니다.

 

 

나가는 길에 연지가 보이구요. 연꽃이 피면 보기 좋겠지요.

 

 

가는 길에 청솔모가 길가에 모습을 들어냈습니다. 사진을 찍으라고 가만히 서 있네요.

 

 

이제 이 늦겨울이 지나면 봄이 완연해 지겠지요.

 

 

이렇게 길을 따라 나가면 주차장이 나타납니다.

 

 

추천 대상

17기의 릉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관람을 하고 나니 뭔가 뿌듯하기도 하고 먹먹하기도 하네요. 오늘도 꽤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하고 있었구요. 전체를 모두 돌아보는데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되므로 걷기 좋아하는 분들에게도 추천드리는 곳입니다. 특히 아이들에게 조선의 역사를 알려주는 데는 더 없이 좋은 곳 같습니다.

단점

단점은 없습니다.

개인 평가

개인적인 점수입니다. 그냥 재미 삼아 보세요.

[접근성] 85점

[경제성] 100점

[희소성] 80점

[관광성] 85점

[안정성] 98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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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아빠

메인으로 국내 여행지를 소개하고 컴퓨터/IT 관련 정보도 있습니다. 여행 많이 하시고 항상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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